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단 편집) === 암흑기, 번역가 활동 === 1920년대 중반부터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협회가 문학을 심하게 통제했으므로 혁명을 찬양하지 않는 파스테르나크는 창작 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그러던 중 1930년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조지아|그루지야]]의 시인인 '''파올로 야시빌리'''(პაოლო იაშვილი/Paolo Iashvili, 1894~1937)를 만났다. 그 때는 한 문학잡지에 그의 자전적 수필인 《안전통행증(Охранная грамота)》(1932)이 연재되고 있을 때였다. 이 수필이 우리나라에는 《어느 시인의 죽음》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앞에 설명한 스크랴빈, 코헨 교수, 마야콥스키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연재 당시 두 사람은 서로가 마음이 맞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마야콥스키의 고향인 그루지야에 처음 방문한다. <푸른 뿔>그룹의 여러 시인들의 소개를 받고, 거기서 또 한 명의 친구가 될 '''티치안 타비제'''(ტიციან ტაბიძე/Titsian Tabidze, 1895~1937)를 만난다. 파스테르나크는 [[캅카스]]를 여행하며 엄청난 [[컬쳐쇼크]]와 [[지상락원|지상낙원]]과도 같은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그루지야는 파스테르나크 생애 제 2의 고향이 된다. 파스테르나크는 두 번에 걸친 그루지야 방문에서, 그 밖에도 게오르기 레오니제(გიორგი ლეონიძე/Giorgi Leonidze, 1899~1966), 시몬 치코바니(სიმონ ჩიქოვანი/Simon Chikovani, 1902~1966) 등의 여러 시인들을 만나며 몇몇 시인들의(특히 레오니제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일은 점차 커져서, 그를 감시하는 위원회 임원 니콜라이 티호노프, 빅토르 골체프 등과 함께 1933년 11월 그루지야를 다시 방문할 때는 아예 티호노프와 함께 이 지역 시인들의 작품을 죄다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고, 1935년에는 그 결과물을 '''《그루지야 서정시》'''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발간했다. 그 외에도 1934년에는 그가 번역한 바자 사벨라의 서술시 《뱀을 먹는 사람》 단행본과 레오니제, 치코바니, 야시빌리 등등의 작품을 번역해갔다. 말로는 암흑기였지만, 파스테르나크에게는 시인으로서 값진 경험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경사는 앞으로 다가올 피바람의 폭풍전야에 불과했으니... 1932년에 극단적인 혁명사상을 모토로 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РАПП)이 해체되고 소련작가동맹으로 재결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작가들이 체포되고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처형당하거나 압박을 못 견뎌 자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 중에서는 파스테르나크가 사랑했던 티치안 타비제와 파올로 야시빌리가 끼어 있었고, 파스테르나크는 타비제의 처형 소식을 1954년에야 전해듣고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빠졌다. 당시 그는 타비제에게 끊임없이 소련작가동맹 눈치 보지 말고 네 생각을 펼치라고 조언했기 때문에, 그 말을 고스란히 듣고 시를 쓰던 타비제는 결국 혐의가 찍혀 희생된 것이었다. 옆에서 끌려가는 타비제를 본 야시빌리는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워 그루지야 작가동맹 본부 건물에서 자살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생전의 야시빌리를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로 기리며 크게 슬퍼했다. 타비제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타비제의 아내 니나 타비제에게 온갖 언어를 쥐어짜며 10여 년동안 격려해 줬지만, 결국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눈물이 마르지 못했다. 1930년대의 피바람 속에서 파스테르나크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숙청 [[레이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에는 스탈린의 직접적인 역할이 적용했다. 스탈린은 그 이미지와는 달리 혁명가가 되기 전에 시인이었고, 모어인 조지아어 문학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파스테르나크가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준 것은 스탈린에게 큰 호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 개인은 파스테르나크와의 대화를 통해 그를 너무 자기 세계에 빠져서 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4차원]] 또라이로 분류했기 때문에 자신이 팬이었던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로 유명한 러시아 소설가. 단 이 쪽도 숙청만 피했을 뿐이지 평단과의 마찰, 지속적 가난 등으로 그리 좋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와 더불어 숙청 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고 체포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타비제를 부추긴 게 파스테르나크인 건 몰랐나보다. 불쌍한 타비제...~~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체포된 동료 시인 [[오시프 만델시탐]]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는데[* 만델시탐은 일명 "크렘린의 높으신 분"이라는 제목의 스탈린 풍자시를 비공개 낭독회에서 공개했는데 그 시가 어찌저찌 엔카베데 귀에까지 들어가 체포된 상태였다. 여담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문제의 그 비공개 간담회에 참석하였는데, 시 자체는 그리 좋게 보지 않았지만 만델시탐의 구명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당 문서 참조.] 스탈린이 만델시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질문하자 시종일관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했고, 스탈린은 '동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그를 대차게 깠다. 게다가 당시 [[신세계의 신]]과도 같았던 스탈린과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파스테르나크의 제안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설마 진짜 또라이는 아니겠지~~ 여하튼 이런 기행(奇行)으로 만델시탐은 석방은 못 됐지만 처형은 면했으며[* 타지 추방으로 끝났다. 북서 우랄의 도시 체르딘으로 추방당했으나 탄원 끝에 보로네시에 정착하였다. 운도 좋았고, 만델시탐이 유명 시인이라 [[니콜라이 부하린]] 등 여러 사람들이 탄원 운동에 나서준 덕분이었다. 다만 1937년 대숙청은 피할 수 없어서, 만델시탐은 결국 37년 체포되어 블라디보스토크의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38년 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파스테르나크 본인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해서 "구름 속에 사는 이 사람을 건드리지 말 것"이라고 메모했다고 한다.[* 만델시탐의 아내 나데즈다의 증언에 따르면 부부가 보로네시에 도착한 이후 파스테르나크에게 스탈린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정말 만델시탐이 훌륭한 시인이냐"고 딱 한마디를 물었다고 하는데, 통화 거의 한 달 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만델시탐 부부는 그 뒤부터 숙청을 항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후에 파스테르나크는 숙청을 회고하며 "숙청에 대해 기술하려면 심장 박동이 멈추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증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파스테르나크는 동료들과 함께 타타르스탄의 치스토폴로 피신했다. 그 동안에도 그는 계속 [[조지아|그루지야]]의 시들과 더불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집》(1953년 출판)이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1953년 출판) 등을 계속 번역했다. 러시아에서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번역 방식으로 대중들로부터 명역이라며 사랑을 받았는데, 일부 비평가는 영어 각본을 이른바 '파스테르나크화'했다고 줄기차게 깠다. ~~깔 게 그렇게 없었나 보다.~~ 그러나 나중에 영국 왕립 극단이 햄릿을 무대에 올릴 때 파스테르나크의 번역본을 원본과 대조해가면서 원래 대사의 묘미를 더 살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 퀄리티는 그야말로 넘사벽... 옆 마을에 살던 친한 동료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1941년 가을에 자살했고, 그녀를 말리지 못한 자신은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 1943년 8월, 그는 치스토폴에 아내와 아이들을 놓아두고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전선으로 가기까지 그는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 '전 언제 가나요'라며 재촉했고,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는 답변만 9개월을 받았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새로운 시집 몇 편을 더 출간했는데, 1943년의 '''《새벽 기차를 타고(На ранних поездах)》'''가 여기에 속한다. 이 때부터 그의 제2의 창작활동이 시작되었지만, 상황도 상황이고 압박이 여전히 심했으므로 그 뒤에는 다시 침묵을 지키는 척하면서 모스크바의 외곽 페레델키노[* 당시 문인들이 많이 살던 휴양촌 지역으로 유명했다.]의 저택에 [[방콕]]하여 [[닥터 지바고|무언가]]의 집필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바깥세계에서는 중앙위원회 서기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파스테르나크의 동료 시인들인 미하일 조셴코와 안나 아흐마토바를 신명나게 까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